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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인 12월 초순. 바깥 기온은 영하 3~4℃를 오르내리고 있다. 넓은 남쪽 창으로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때문인지 벌렁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 집안 마룻바닥이 그렇게 따뜻하고 아늑할 수 없다. 겨울 햇살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면 추위를 녹이는 데는 그만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밭 건너편 저만치 겨울 해를 등진 채 북쪽을 향해 나지막하게 누워 있는 앞산에는 며칠을 두고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준다. 저 아랫길 양편으로 좁다랗게 펼쳐 있는 밭이며 논의 하얀 눈이 제법 강렬한 겨울 햇살에도 녹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짜기 지형 때문이리라. 천지를 온통 하얗게 뒤덮은 눈이 겨울나무들과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곳으로 내려와 살기를 정말 잘 했다고 몇 번이나 되뇌인다. 경기 일산에서 충남 천안으로
 경기도 일산 신도시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충남 천안시 광덕면 대덕1리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내가 도시생활을 끝내고 삶의 마지막 4/4분기를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산다고 했을 때, 친지들은 『시끌벅적한 대도시 생활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시골로 들어가 살 것이며, 답답하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이냐』고 걱정했다. 물론 서울처럼 활기찬 도시에서 몇십 년을 정신없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문화생활의 기회도 없고,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별로 없는, 온통 고요와 정적뿐인 그야말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은 산골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나는 지금 흙을 파면서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 산골 고향으로 돌아와 살기로 한 결정에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내 인생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심신의 안정과 영혼의 평화를 얻었노라』고 한 선배의 말에 100% 동감하는 것이 요즘의 내 생활인데 어찌 잘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도시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고자 할 때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지를 분명히 정하는 문제다. 「시골에 내려가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山水(산수)나 즐기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식의 막연한 꿈만 가져서는 얼마 못 살고 도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맑은 공기, 시원한 개울 바람, 아름다운 山水에 대한 그리움이 시골생활의 중요한 조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365일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문인이나 화가처럼 자기 일이 있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그도저도 아니라면 내 경우처럼 본격적인 농군은 아니더라도 봄부터 가을까지 밭에 나가 흙과 싸울 각오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주변에 배추나 무, 시금치 몇 포기 심어 놓고 틈만 나면 미식가입네 하고 시골 음식점 순례나 하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떠나온 서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향이나, 은퇴 후의 시골생활이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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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아스팔트 슁글로, 외벽은 시멘트 사이딩으로 처리했다. 실내 난방은 기름 보일러를 사용하고, 바닥에는 온돌마루를 깔았다. | 텃밭 200평, 밭 300평 경작 지난 3년을 되돌아볼 때, 육십이 넘어서 시작한 나의 산골생활 적응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고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소유의 텃밭 200여 평과 마당 건너편, 경작할 사람이 없어 놀고 있는 밭 300여 평을 합쳐 600평 가까운 밭에 갖가지 작물을 심어 거두면서 정말 많은 땀을 흘렸다. 산골짜기 밭이라 그런지 돌은 어찌 그리 많은지, 조금 과장하면 흙보다 돌이 더 많아 괭이나 호미 끝이 먹히지 않고 금속음을 내며 튀는 밭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 맞는 봄,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그 많은 돌을 캐내어 제대로 된 밭을 일구는 일이었다. 밭 한 귀퉁이에 10평 정도의 비닐하우스를 짓기 위해 며칠을 두고 캐낸 돌이 작은 트럭 한 대분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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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큰 창 밖으로 집 앞의 밭과 주위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 겸손은 어디가나 美德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캐낸 돌을 삼태기에 담아 밭 가장자리로 나르느라 땀 흘리는 내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찬 동네 사람들이 올라와 『참 부지런도 하네유』 하고 말을 건넸다. 그것이 인사치레든, 진심으로 하는 말이든 여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시에서 「먹물」만 먹고 살던 사람이 시골 농민들 속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적응하려면, 우선 무슨 일을 하든 그들에게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동네 사람들은 들에 나가 땀 흘려 일하는데 분별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차나 끌고 마을을 들락날락한다면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겸손은 어디 가나 미덕이고, 큰 덕목이지만, 시골에서는 특히 더하다. 시골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들어와 사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눈여겨보는 것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의 겸손 여부다. 외부 사람이 들어오면 이런저런 이유로 경계를 하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터에 겸손은커녕 오히려 교만을 부리고 잘난 체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두 팔 벌려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그 사람 먹물 먹고 펜대만 굴려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먼. 접해 보니 아주 된 사람이여』 동네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는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나 잘 적응하고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이 마을에 집을 짓고 들어와 어떻게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同化(동화)하고 적응해 나갔는지, 개인적인 경험과 그동안의 노력을 얘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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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한겨울 내내 채소와 봄에 옮겨 심을 모종을 키웠다. | 집은 너무 크게 짓지 말자 첫째, 마음 편하게 살고 싶으면 들어가 살 집은 너무 크거나 화려하게 짓지 말자. 너무 돈을 많이 들여 화려한 집을 지으면 동네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내 경우, 돈도 돈이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 처음부터 큰 집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일상의 차림새도 신경을 쓰는 것이 좋다. 마을에서 입고 다니는 옷이 너무 티가 나면 좋지 않다. 가능하면 신이고 옷이고 모두 마을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입고 다니라고 하고 싶다. 「나도 당신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그들에게 심어 줄 필요가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온 그날부터 말투를 충청도 사투리로 바꿨다. 충청도 출신이라고 하지만, 50년이 넘는 타향살이 후에 다시 고향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첫 여름방학이 되어 시골 고향으로 내려와 그동안 배운, 서툰 서울말을 지껄였을 때 시골 친구들이 뒤돌아서며 수군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제까짓 것이 서울에 얼마나 살았다고, 정말 꼴갑하네』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내 어릴 때 경험으로 보면 시골 사람들은 조금 배타적이어서 자기들 사투리가 아닌, 다른 지방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벽을 쌓고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벽을 허물고 다가가고 싶으면 옷차림이나 말투까지도 가능한 한 빨리 現地化(현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이를테면 여름 같으면 동구 앞 평상에, 겨울 같으면 마을회관에 자주 얼굴을 보이는 것도 현명한 처신이다. 우리 집 가까이엔 좌·우 양쪽에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자그마한 도랑이 흐르고 있다. 왼쪽 도랑가에 꽤나 오래 된 은행나무가 있어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도랑 위에 평상(지금은 철거되었지만)을 만들어 놓았다. 이사 오던 첫 해 여름, 나는 해가 너무 뜨거워 일하기 힘든 오후 2시쯤 되면 거의 매일같이 그 평상으로 내려가 어떤 날은 아랫집 유씨 아주머니가 한솥 가득히 쪄 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고, 어떤 날은 내가 들고 간 오렌지 주스며 사이다로 더위를 쫓고, 어떤 날은 윗집에 사는 金장로님이 힘들게 들고 온 어른 머리통보다 훨씬 큰 수박을 쪼개어 먹으며 농사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곤 했다. 술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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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무쇠솥을 건 아궁이를 만들어 나뭇가지로 불을 때 황토방을 덥힌다. | 그러는 사이 건강이 안 좋은 유씨 할아버지는 어느새 코를 골며 오수에 빠져든다. 그렇게 한여름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마을 사람들과 꽤나 가까워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산골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술 마시는 재미, 술 즐기는 멋일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저녁,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널찍한 평상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삼베 잠뱅이 차림으로 마누라와 함께 마시는 맥주 한잔, 가을걷이를 끝냈을 즈음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막 담가 놓은 동동주를, 마침 달빛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안주 삼아 마시는 멋, 눈 오는 겨울 따뜻한 안방에서 궁둥이를 지지며 따끈하게 데워 마시는 정종 몇 잔, 진달래꽃으로 불타는 봄이라면 위스키나 코냑 한잔도 괜찮지 않을까? 술은 산골생활을 한결 멋스럽고 풍성하게 해준다. 시골 사람들과의 서먹서먹함을 푸는 데도 술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낯선 산골생활에 적응하기에는 훨씬 편하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복이 있는 사람 같다. 이 추운 겨울, 집에 들어박혀 있노라면 이런저런 전화가 걸려 오는데, 그것은 대부분 마을 술친구들로부터 걸려 오는 것들이다. 엊그제도 아랫집 정씨로부터 『한잔 어떠냐』고 전화가 걸려 와 나는 서너 명을 더 불러 모아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근처, 늙은 과부가 끓여 주는 동태찌개 집으로 몰려가 겨울 추위를 풀었다. 마을에 이런저런 행사가 있으면 그것을 핑계 삼아 소주 한 박스 들고 가서 같이 어울리는 것도 필요하고, 재미도 있다. 그런 자리에서는 『왕년에 내가 어떤 자리에 있을 때…』라든가 『아무개 회장이 내 대학 동창인데…』 하고 으스대거나 유식한 체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대화는 가능하면 농사일이나 동네와 관련된 것들로 국한시키는 것이 좋다. 집은 수수하고 농촌생활에 맞게 실용적으로 지으라고 권하고 싶다. 내 집은 평당 200만원으로 27평 크기로 지었으니 5000만원이 조금 넘게 들어간 셈이다. 벽 한쪽에 붙여 지은 5평 정도의 황토방, 창고와 차고, 그리고 집 앞쪽과 옆쪽의 예쁘장한 테크까지 합치면 7000만원쯤 들었을까? 물론 평당 15만원을 주고 산 집터는 따로 계산해야 할 것이다. 비교적 싸게 지은 집이지만, 겉에서 보면 그럴듯해서 돈이 꽤 든 것처럼 보인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벽에 하얀 회를 바르고 그 위에 흑갈색 방부목 판을 가로·세로로 붙여 놓아, 멀리서 보면 스위스나 독일 남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프스풍의 집 같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 집을 찾아온 친구가 붙여 준 「언덕 위의 스위스풍 하얀 집」이라는 이름이 그럴듯해 보이는 집이다. 집 자체는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터 는 정말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면사무소 쪽으로 마을 하나를 더 지나 나타나는 「성절」이라는 동네에 집을 지어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었다.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란, 지난 50여 년 동안 그토록 자주 꿈속에 나타나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중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던 친구가 찾아와 자기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터가 있는데 한번 가서 보고 마음에 들면 거기다 집을 지어 보라고 권했다. 가서 둘러 본 즉시 나는 「전원주택 자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결정해 버렸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하기가 그만이고, 저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을 집들과 논·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다란 자리며, 좌·우 양쪽으로 흐르는 도랑의 맑은 물, 골짜기라고 하지만 산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산불 날 걱정 안 해도 되고, 어디를 보나 가파르기 짝이 없는 惡山뿐인 광덕면 지형과는 달리 이 곳만은 부드럽고 아늑한 산세여서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아침 겨울 햇살의 아름다움 특히 좌·우로 흐르다가 저 아래 발밑에서 서로 만나는 도랑의 지형이 마치 여자의 사타구니 같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집터가 배꼽 아래 陰部(음부) 위쪽 도톰하게 올라온 부분 같기도 해서 평범한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땅을 권하면서 『할아버지가 이 터에 집을 짓고 살면서 부자가 되어 저 아래 들녘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곳이 생명·생산·多産(다산)을 상징하는 여자의 음부쯤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해도 어거지는 아닐 것 같다. 우리집 자랑거리라면 이처럼 풍수지리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집터 말고도 봄철에 돌 틈을 빨갛게 장식하는 연산홍, 여름의 꽃잔디, 늦가을에 집 주위를 온통 노란 빛깔로 물들이는 국화, 겨울이면 피어나는 앞뜰 호두나무와 감나무의 하얀 눈꽃을 꼽을 수 있겠다. 황토방도 우리집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나는 손님이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이 황토방으로 안내해 『이 곳이 바로 소위 웰빙 룸으로서 내 시골생활의 보람을 안겨 주는 곳』이라고 자랑하곤 한다. 이 집에 살면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기분 좋은 것은 아침 일찍 동쪽 창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햇살의 아름다움이다. 심신과 영혼의 평온을 되찾아 나는 3년 전 겨울 이곳에서 처음으로 맞은 아침의 그 태양, 그 겨울 햇살을 잊지 못한다. 저 아래 산등성이 뒤로 막 올라온 하얀 해가 널따란 창문을 통해 마루 가득히 햇살을 비춰 주던 그 순간 나는 얼마나 감격했던가. 우리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이번 겨울에도 나는 하늘이 맑은 날이면 아침마다 동편 창가로 나가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과 그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소녀처럼 감격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곳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던가」 혼자서 마음 뿌듯해한다. 서울로, 외국으로 50년 넘게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비로소 고향의 품으로 돌아와 고달팠던 심신과 영혼의 평온을 되찾은 느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