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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은 이렇게 살았습니다한명숙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마른땅 2010. 5. 26. 10:53

한명숙은 이렇게 살았습니다한명숙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Posted at 2010/05/24 13:19 | Posted in 시사 [時事]/정치·사회·경제


                


한명숙 그는 누구인가?


한명숙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드는 인상비평이 부잣집 마나님이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이 포근한 얼굴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 사람들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 줄 때면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이고 살았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한명숙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부자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어려서는 빈민에 가까웠으며 나이 들어 서민으로 살다가 늘그막에 겨우 이사 걱정 없이 집 한 채 지니고 사는 게 재산의 전부다. 하지만 그 집 마저 갚아야할 융자금이 남아 있다.

한명숙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의 6남매 중 맏딸로 자랐다. 날 때부터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한명숙 부모님은 모두 북한 평양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당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평양의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유복했으며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가족의 윤택한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시이다. 그 곳에서 나고 다섯 해를 살았다. 하지만 다섯 살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고향에 대한 나의 기억을 유년으로 격리시켜 버리고 말았다. 다섯 살 코흘리개에게 무슨 고향의 추억이 아련할까마는 난 하시라도 내 고향이 평양이라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부모님이 평생토록 가슴에 저미고 살아오신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몇 달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믿음으로 값나가는 집안의 전 재산을 고향땅에 묻어 둔 채 변변한 차림도 없이 월남하셨다. 그러나 그 짧은 몇 달은 평생의 한으로 남아 결국 50년이 넘는 세월을 고향을 그리다 끝내 타향에서 망향의 넋이 되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 온 내가 이후 통일과 평화운동에 참여하게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거니와난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까지 현실과 세상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다. 나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는 불문학도였으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고픈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도 평범한 문학소녀였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꿈만 먹고 살던 순수 몽매한 나에게 한 명의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나의 전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꾸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내 인생은 평범한 삶에서 고난에 찬 삶으로,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해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변모시킨 키다리 아저씨. 그가 바로 내 남편 박성준이다.


내가 남편 박성준을 만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나는 당시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마르고 껑충한 박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연합 써클의 회장이었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학생 연합단체였다. 나는 남편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현실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왔던 나에게 남편은 내가 미처 몰랐던 성서의 참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나는 비로소 참 신앙은 개인의 영적체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참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난 점점 남편의 철학과 삶의 태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미 둘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였다.

군사독재에 저항한다는 것은 개인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며 목숨까지 걸어야할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러한 위험한 결정임에도 내가 기꺼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 것을 결심한 것은 남편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드디어 우리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의 결합은 동지와 동지의 연대였으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었다. 1967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서약과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그야말로 꿀과 같은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채 익히기도 전에 신혼의 단꿈은 무참하게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1968년 7월. 남편이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이 갇혀있던 대전교도소는 일제시대에 정치범 수용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서울에서 약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남편이 수감되던 그 날부터 출옥하는 그 날까지 (교도소 규정에 따라) 단 한 번의 어김도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붙여오는 답장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았다. 비록 교도소의 검열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온전하게 전달할 순 없었지만 남편과 나의 옥중서신은 13년 동안 서로의 이상과 사랑을 오롯하게 확인할 수 있는 창구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 이화여대 사감을 지내던 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지원하다 결국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새롭게 직장을 옮긴 곳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나의 인생을 뒤 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당시 한국사회에 산재해 있던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위하여 창설되었지만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간자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그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종교를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당시 여성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집단 여성교육 과정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교육생 보다는 나 스스로였다.

교육과정에서 나는 너무도 소중한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등 가난하고 소외 받는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감동은 나를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 때 만난 분들은 지식인 여성들과 더불어 한국 진보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6년 동안의 교육은 실질적인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 그 어떤 폭력도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폭력은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며 폭력은 인격에 대한 살상이다.
폭력을 응징하기 위한 폭력조차 사라져야 마땅하다.
더구나 고문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때의 두려움으로 손이 떨린다. 나는 정말, 정말, 정말 그 모멸의 순간이 영원히 내 기억에 지워져 고문이라는 범죄를 알기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만 싶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하나님께 나를 고문했던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고문의 기억은 여전히 내 상념의 어두운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숨어 있다.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귓전에 울려오는 욍욍거림 속에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아스라하게만 들려왔다.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잃었고 차라리 그 순간이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아! 나는 패배했다. 나의 믿음과 나의 각성과 나의 정의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의 믿음은 잔인한 고문 앞에서 얼마만큼 우습고 허약한 것인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나는 삶에 희망을 잃고 절망했다. 언제 다시 되풀이 될지 모를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안으로 안으로만 웅크려들고 있었다. 고문에 굴복한 나의 사라져 버린 정체성이 혐오스러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전의 한명숙은 사라지고 한명숙이 아닌 또 다른 나라는 사람이 지금의 나를 혐오하며 저주하고 있었다.

1979년 11월 13일 그 날의 기온은 영하 13도였다. 내가 구치된 서울구치소에는 난방장치는 물론이며 온기가 퍼질 불씨라곤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치범인 나는 독방에 구치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가질 동료조차 없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나의 가냘픈 몸뚱이를 쩍쩍 갈라터질 듯한 맵고 아픈 추위가 파고들었다.

내가 입고 있던 푸른 수의는 처절한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너무도 얇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잠시라도 추위를 잊고 싶었지만 시간은 더디 가고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깜빡 자다 소스라치게 깨어나면 매서운 칼바람의 울음이 옥방을 스쳐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추위와 싸우다 보면 어느덧 어둠이 걷히고 하얗게 동이 터왔다.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리끼는 꽁꽁 얼어붙어 정오의 햇살이 옥창을 넘나들 때 쯤 간신히 녹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텅 빈 독방이 주는 중압감과 나의 소리를, 나의 마음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뼛속 깊이 후벼 파는 절체절명의 외로움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아무리 호흡을 하려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유리도 없는 커다란 옥창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살을 저미듯 불어왔지만 목젖까지 컥컥 숨이 막혀왔다.

기어서 배식을 하는 식구통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길고 좁다란 교도소의 복도가 보였다. 그곳은 밖이었고 내 몸뚱이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저만치 교도관이 보였다. 사람, 사람을 보았다. 비로소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눈물이 야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고 말 것인가?

그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기력을 찾고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나를 한없는 절망의 끝 언저리에서 건져 준 것은 여동생 한이숙이 넣어 준 한 권의 책이었다. 그 책은 본훼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 디트리히 본훼퍼,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나찌 정권에 대항하다 결국 게슈타포에 붙잡혀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지만 종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끝내 총살을 당한 실천적인 종교인이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본훼퍼의 이 한마디는 나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건져 올려주는 동아줄이 되었다. 나의 처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고통을 이겨 내어 결국 승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본훼퍼의 글은 너무나 큰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면 다시 읽곤 하였다. 특히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날은 꼭 그 책을 읽고 마음의 무장을 다시 했다.

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호흡 곤란증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겨울은 깊어만 가고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왔다.

내 인생에 차마 잊혀지지 않는 소중하고 고귀한 성탄전야이다. 성탄이 다가오자 나는 더 외로워졌다. 가족과 동지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잊을 남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난 그리움이 얼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목젖이 울컥거리며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그 때 꿈결처럼 아득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 울림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난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를 따라 방 옆에 붙어있던 악취 풍기는 변소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옥창의 창살을 부여잡고 세상 밖으로 귀를 내밀었다. “한명숙, 한명숙. 힘내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수인번호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나, 한명숙을 부르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그 소리는 겨울바람에 실려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며 나의 귓전을 힘차게 울렸다. 동지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동지들의 목소리였다. 동지들은 성탄 새벽, 교도소의 뒷산에 올라 갇혀있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합창했던 것이다.

조금 후 멀리서 옥에 갇힌 우리를 위해 불러주는 동지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성탄의 새벽을 잔잔하게 깨우고 있었다.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성탄 메시지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한명숙! 이 이름 석 자에 담긴 동지애가 빛을 잃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좌절해 있던 나를 극적으로 소생시켰다.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옥방의 창살에 매달려 그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탄의 새벽을 맞았다. 나는 그 날 나를 불러 준 동지들의 목소리에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를 짓누르던 외로움과 호흡곤란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교도소 측은 면회를 금지시켜 외부로 부터 일체의 정보를 차단했다. 때문에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교도소 측은 재소자를 방에 가두고 일체의 사역을 금지시켰다. 우리는 그 열흘 동안을 전쟁 비상식량인 건빵 하나만으로 견뎌야 했다. 무료하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교도소 운동장에서 요란한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다. 작은 옥창을 올려다보던 한 재소자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삐라다!” 재소자 모두는 일제히 감방 꼭대기에 붙어있던 옥창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럴 수가... 감방의 벽을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한 대의 군용 헬리콥터에서 는 빨간 삐라가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전쟁이구나! 재소자 모두가 전쟁을 직감했다. 북한군이 아니면 대체 누가 붉은 색 삐라를 뿌린단 말인가? 광주시민군과 진압군이 대치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재소자들은 교도소 밖의 교전 상황을 전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 국군이 보호의 대상인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감방 안은 전쟁의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만약 현 사태가 전쟁이라면 정치범은 제일 먼저 총살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서의 여성 정치범은 나 혼자였다. 간수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방안 식구들에게도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난 열흘 내내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에워 싼 감시망 아래 난 철저하게 고립되고 있었다.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죽음이라는 공포와 이름 모를 열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심리적인 극한 상황에 열병까지 겹쳐지자 고문의 후유증으로 피폐된 나의 건강은 결국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열흘 후 교도소 당국은 소내 방송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발표했다. 광주에서 일부 폭도들의 난동이 있었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잘 해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그 때서야 겨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삶의 의욕이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헬기에서 흩뿌려지던 빨간 삐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열흘간의 감방 감금이 끝나고 교도소 운동장으로 나가던 날 나는 그 빨간 삐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삐라가 아니었다. 오월 교도소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선혈처럼 빨갛고 고운 진달래와 철쭉의 꽃잎이었다. 성난 헬리콥터 프로펠러의 돌개바람에 옥뜰의 곱디고운 꽃잎의 주검들이 소용돌이 친 것이었다. 오월이 되고 오월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난 파란 오월 하늘에 붉게 흩날리던 그 날의 꽃잎이 광주의 아픔과 함께 되살아난다.

1981년 8월 15일. 나는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2년 6개월만의 석방이었다. 나를 고문하고 핍박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했던 민주화는 아직 이 땅에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진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신군부가 더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의 삶을 옭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방의 기쁨과 싸움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허탈감 보다 새롭게 싸워야할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1981년 12월 25일 오후 2시 남편은 13년의 기나긴 형기를 마감하고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떠났던 남편은 이제 마흔 한 살의 중년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어여쁜 새색시에서 중년을 바라보는 서른일곱의 아낙이 되어있었다.

남편과 나의 늦은 신혼은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 온 행복에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남편은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다. 감옥에서 보낸 13년 동안의 삶 속에 남편에게 신앙은 크나 큰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나는 여성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 당시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여성연합회회원들은 구속자 어머니들과 함께 수 백 개의 빨간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섯다. 우리들 뒤로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수 십 만의 목소리가 함성으로 변해 종로 한 복판을 쩌렁거리며 울렸다.

좌우의 빌딩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창을 열어 우리의 구호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종로 네거리로 수 천 명의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진입해 오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 난 전경들의 위압에 눌려 시위대는 잠시 술렁거렸다. 눈 감짝할 새 우리 여성연합회 회원들 앞으로 수 천명의 전경들이 열을 맞추어 한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우리 여성들은 떨리는 입을 열어 단 세 글자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쏘지 마!” “쏘지 마!” 하지만 우리의 소리는 너무 작았다. 수십만 명의 구호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그것은 독재와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피 맺힌 절규였다. 우리의 외침이 울음으로 바뀌어 갈 때 쯤 우리의 작은 소리는 점점 메아리를 타고 있었다. 조금씩 거세지던 외침은 끝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가 “쏘지 마” “쏘지 마” 우레와 같은 절규로 물결치고 있었다.

수 십만이 외치는 함성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한 손에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한 발씩 전투 경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피곤에 찌들어 무표정한 전경들의 가슴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달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의 고요를 타고 사랑과 용서가 담긴 카네이션 향기는 거기 있는 모두의 가슴에 전율로 와 닿았다. 전투경찰들 역시 평화의 향기에 취해 한동안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비록 시위대와 전경은 독재정권의 폭정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리의 형제이고 아들이며 살을 부비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동포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꽂아 준 카네이션을 멍하게 바라보던 전투경찰의 크고 순진한 눈망울을 기억한다.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용서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출처 / 아고라